HOME > 이름사랑 NameLove > 한국의 성씨 > 성씨의 인구별 순위
전체 68(56)개의 본관과 306,022가구, 984,913명[7위]. (2000년 통계청 자료)
총 54개의 본관과 877,050명 [7위]. (1985년)

조씨는 조선에서 세도 가문으로 손꼽히는 명문이다. 문헌에는 본관을 230개 본까지 기록하고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20본 미만이다.
조씨의 상고는 일정하지 않아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으며 다른 성씨와는 달리 동성이라고 해서 동원동근을 주장하지 않는 특성이 있으며, 조선 현종에 이르기까지 동성이본도 통혼을 금했던 전통적인 관례가 있었다.
조씨는 고려 중기 이후에서부터 조선에까지 도덕, 문장, 벼슬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조선의 명문벌족을 세도를 굳혀 역사를 수놓았다.
 
 
시조 조지수(趙之壽)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조에서 조순대부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문헌이 실전되어 거의 선대와 벼슬하던 왕조 및 생존 연대는 상고할 수 없고, 묘소의 소재도 확실하지 않아 옛날 묘소가 있었다는 함경남도 영흥군 서면 은곡동에 제단을 모아 춘추로 향사해왔었다.
그러다가 해방 이후 내왕이 막혀 그곳 소식조차 알 길이 없게 되었다.
본관은 그의 후손들이 문천군 용진에서 세거하다가 조선 개국 때 한성으로 옮겨 크게 번성하고 명문 거족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한양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한양조씨의 번성
시조 조지수(趙之壽)의 후손에서 총관공파(摠官公派)와 판도공파(版圖公派)로 대별된다.
한양조씨에서는 3명의 조선 개국공신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옥(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를 지낸 온(溫)은 총관공파이며, 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영무(英茂)는 판도공파이다.
대표적 인물은 광조(光祖)이다. 개국공신 온의 현손으로 당대의 이름난 도덕가요 성리학자였다. 이이(李珥)는 김굉필(金宏弼), 조광조,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등 4인을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한양조씨의 인물은 총관공파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판도판서 인벽(仁璧)의 아들 4형제(溫, 涓, 侯, 師)의 후손이 가장 번창하였다.
 
조씨의 본관
본관은 문헌에 대략 200여 본이 전하나, 몇 본이 현존하는지는 미상이다.
그 중에서 풍양(豊壤), 한양(漢陽), 양주(楊州), 임천(林川), 배천(白川), 함안(咸安), 순창(淳昌), 횡성(橫城), 평양(平壤), 김제(金堤), 직산(稷山) 등 10여 본이 대본(大本)으로, 이들이 전체 조씨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조씨의 상계(上系)는 일정하지 않다. 이들은 다른 성씨와는 달리 동성(同姓)이라고 해서 반드시 '한 할아버지의 자손'임을 내세우지 않는다. 또, 조씨들끼리는 전통적으로 타본(他本)이라도 통혼(通婚)하지 않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다.
조씨 중에서 양주, 평양, 임천, 배천 등은 송대(宋代)의 귀화족으로 알려져 있다.

조씨는 조선 개국공신 40여 명 가운데 8명으로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602명, 상신 19명, 문형(양관대제학) 10명, 왕비 3명, 청백리 6명과 판서급 수십 명을 배출하였다.
1975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가구수 15만 1, 999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2. 3 %로 249성 중 제7위였고,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인구 87만 7, 050명에 가구수 20만 7, 895가구로 274성 중 역시 제7위로 나타났다.
 
한양조씨의 인물
조인옥(趙仁沃)
[ ?~1396 (?~태조5) ]
1373년(공민왕22) 음보로 산원이 되고, 1378년(우왕13) 판전의시사를 거쳐 다음해 이성계(李成桂)의 휘하에 종군했다.
위화도에서 회군, 최영(崔瑩) 등 구세력의 숙청에 가담했다.
이어 전법판서에 승진, 회군공신이 되고, 1389년 정도전(鄭道傳)등과 우왕을 폐위시키고, 창왕을 옹립한 뒤 신진세력의 중신인물로서 척불숭유와 전제개혁을 적극 지지하여 신진개혁의 기반을 닦는데 크게 활약했다.
1392년 밀직제학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고 이 해 정도전 등과 이성계를 추대,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중추원부사가 되고, 개국공신 1등에 올랐다.
1395년(태조4) 한성군에 봉해지고, 다음해 정조겸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태조묘에 배향되었다.

조온(趙溫)
1392년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이 되고 한천군에 봉해졌다.
다음해 서북면 도순문사로 수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격파했고,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에 친군위 도진무로 방원을 도와 공을 세워 정사공신2등이 되고, 중추원사를 거쳐 의흥삼군부 좌군동지절제사, 상의문하부사, 지문하부사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참찬문하부사로서 방간등의 군사를 평정, 삼사 좌사에 오르고, 다음 해 참찬의 정부사로 좌명공신 4등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이 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02년 의정부 찬성사, 동북면 찰리사를 지냈다.
청렴검소하기로 유명하였다.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 (성종 13~중종14)]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14세 때 어천도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회천에 무오사화로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5년(중종1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전적, 감찰을 역임하며 왕의 신임을 얻고, 입시할 때마다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을 것을 역설했다.
그 후 정언, 수찬에 이어 호조, 예조의 정랑을 거쳐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해 여씨향약을 8도에 실시하게 했다.
다음해 부제학이 되어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히 주청,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이를 없애게 했다.
1519년 대사헌에 승진, 세자빈객을 겸했으며 현량과를 실시하여 자기 일파의 신진사류인 소장학자들을 요직에 안배하는 한편,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등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마침내 훈구파의 반발을 야기시켰다.

훈구파의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은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사류를 무고하게 하고, 대궐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 궁녀로 하여금 이를 따서 왕에게 바쳐 의심을 조장하는 한편,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한다’고 무고했다.
이에 조광조의 도학적 언행에 염증을 느낀 왕은 그를 투옥,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사형을 면했으나 능주에 유배, 훈구파의 끈덕진 공격으로 사사되었다.
정암 조광조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밝게 비추리

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되고 증주의 죽수서원, 양주의 도봉서원, 회천의 우현사 등에 제향되었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 )의 천거로 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 감찰, 정언, 수찬, 교리, 전한 등을 역임하고 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 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 남곤(南袞), 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킴에 따라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김굉필(金宏弼)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조지훈
"얇은사 하이얀 고깔은으로 시작하는 시 <승무>로 유명한 시인 조지훈( 1920~1968)이 이곳 일월면 주곡리 사람이다. 지훈(芝薰)은 호이며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등단해 한국의 고전적인 미와 불교적 세계를 노래하였으며 박목월, 박두진과함께 "청록파" 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는 시인의 이름으로 돋보이지만 그것은 청년기의 일이고 중년에 학자로서 활동한 것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942년에 조선어학회에서 낸 『큰사전』 편찬에 참여하였고 1947년 부터는 고려대학교 교수로서 『한 국문학사대계』를 기획하여 간행하는 등 학문적 활동도 활발하였다. 시집으 로는 "역사앞에서" 등 여러 권이 있고, "지조론, 한국문화사 서설" 등의 저 술도 남겼다.

이곳 주곡리 주실 마을은 한양조씨의 동족마을이기도 해서 350년 된 마을의 아늑한 분위기도 느껴볼 수 있다. 한양조씨는 조선 중기인 350년 전쯤에 조 광조 친족의 후손이 사화를 피해 들어와 정착하게 되면서 마을을 이루었고 주실 조씨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조지훈이 태어난 집은 본래 조선 중기 인조 때에 이곳 주곡리 주실마을에 입 향한 시조 조전의 둘째아들 조정형이 지은 집으로 주실 마을의 대종가인 호 운종택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일부가 불에 타 1963년에 크게 고쳐 지었으 며 옛집의 맛은그다지 남아 있지 않다. 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조지훈의 시비를 그의 생가 앞에 마련하여 문학기행을 하는 사람들 이 즐겨 찾고 있다.
그리고 시비는 영양읍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봉화 재산 가는길로 조금달리다 가 생가가 있는 마을 입구에 느티나무와 아가시아 나무숲속에 "빛을 찾아가 는 길"이 새겨진 조지훈의 시비가 서 있다. *조지훈(1920-1963)

시인. 본명은 조동탁(越東卓). 경북 영양출생. 47년 혜화 전문학교서 불교를 배우고 39년 "문장(文章 : 3號)"에 "고풍의상(古風衣裳)"으로 추천되어 문단 에 나서서 청록파(靑鹿派)의 한 사람으로 46년 "봉황수(鳳凰愁)", "산우집( 山雨集)" "풀닢단장" 등 주옥같은 명시를 많이 남겼다.

그는 자신의 작품 계열을 1. 민족 정신의 표현, 2. 자연 교감(交感)과 패여 정조(覇旅情調)의 표현인 "파초우(芭蕉雨)", "완화빈(玩花빈)", 3. 서경(敍景 )과 선감각(禪感覺)을 표현한 "마음", "고사(古寺)", 4. 자연과 인간에 대한 적료감(寂廖感)과 희구를 표현한 "풀잎단장", 5. 해방 후의 민족적 비분(悲憤)을 그린 "암혈(岩穴)의 노래", "불타는 가슴", 6. 자연과 인정을 노래한 "아침", "풀밭에서" 등 산문체 시로 나누어 말했다.
박목월, 박두진 등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뒤에와서 시 세계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온 데 반하여 그는 초기의 자연친화(自然親和)의 시 세계를 비교적 많이 유지해 왔다. 고 전적 제재를 가지고 민족 정서를 섬세한 언어로 균형과 조화의 미를 이루면 서 한편으로 선적(禪的)인 깊이를 간직함으로서 심오하고 아늑근 느낌을 주 는 것이 그 시의 특징이다.
56년 자유 문학상 수상, 해방 후 경기여고 교사, 조선어학회 편찬원, 서울시 문화위원회 위원, 문교부 국어심의회 의원, 한국시인헙회장(67), 고려대학교 교수 등을 역임했다.
 
유적지
강씨는 하(河), 정(鄭)씨와 더불어 진주, 진양의 3대 성으로, 특히 하씨와는 다같이 이 지방의 토성(土姓)이므로 전통적으로 가까이 지내고 있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0만 4760가구에 59만 2984명으로 총인구의 2. 4 %를 차지하여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6위였으며, 1985년도 조사에서는 22만 7093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2. 4 %, 순위는 274성 중 역시 제6위였다.
020104 방송 0505(15분) 땅방 KBS2R언제나청춘 성씨의 고향 21 `창녕조씨
창녕조씨(昌寧曺氏)
 
시조
죽수서원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은 문정공 정암 조광조(l482~1519)와 혜강공 학포 양팽손(l488 ~l545) 을 배향한 서원으로 전남지방에서는 순천의 옥천서원에 이어 두번째로 l570년에 사액받은 서원이다. 정암은 중종 l4년(l5l9) 기묘사화의 화를 입어 능성현에 유배되었다. 이때 평소 정암선생을 흠모하고 생원시와 현량과에 함께 등용되는 등 여러모로 인연이 깊었던 학포선생도 관직을 삭탈당하여 고향인 능성현에 와 있었다.
이에 자연히 조석으로 만날 수 있게 된 정암과 학포는 서론 강론하면서 의리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정암선생이 유배된지 1개월 정도에 사사를 당하자 학포는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지내고 서운태 (서원터)마을에 모옥을 짓고 춘추로 문인 제자들과 함께 제향하였다.

이후 선조 1년 (1568)에 정암선생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조정에서는 정암을 향사할 서원의 건립이 논의되었고 선조 3년(1570) 다시 능성현령 조시중의 협조로 천일대 옆(현위치)에 서원을 짓고 죽수란 사액을 받았다. 그후 1613년 서원을 중수하였고 l630년 도내 유림들과 조정에서는 사계 김장생 등의 발의로 학포선생을 죽수서원에 배향하였다.
l868년 죽수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어 위패는 매안하였고 단만을 마련하고 제향하였다. l97l년 능주의 유림과 제주양씨 후손들이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복원하였다. 그러다가 l983년 다시 한양조씨 조국조를 중심으로한 정암선생 후손들에 의하여 원래의 위치이자 죽수서원 사액을 받은 모산리에 죽수서원 복원을 추진, 월곡리의 건물을 이건하고 신축하였다.
서원의 경내는 중앙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내삼문과 좌우로 둘러진 담장에 의해 제향구역과 강학구역으로 분리된 전학후묘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1989년 동재를 신축하고 1994년 외삼문 보수, 1997년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조동(趙洞)마을의 전설
중동은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가운데마을 혹은 간데말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고친 것이다. 성산제2동의 행정관할동인 중동은 갑오개혁때 처음으로 한성부 구역으로 편입되었다.
곧 한성부 북부 연희방 성산리계 중동이었는데 1911년 4월1일에는 경성부 연희면 중동이 되었다가 1914년 4월1일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중리로 되었다.
1949년 8월15일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중리(中里로)’로 되었다가 이듬해 3월15일 서울시조례 제7816호와 서울시조례 제979호에 의거 남가좌동 일부가 중동으로 포함되면서 서대문구에서 마포구로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른다.

중동은 ‘조동(趙洞)’이라고도 하는데 한양조씨(漢陽趙氏)가 오래 살아 유래된 것이다. 1945년에 발간된 <조선의 전설>이라는 책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고려 때 한양조씨의 시조가 되는 조지수(趙之壽)가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아 촌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후일 첨의중서(簽議中書)까지 오른 후 개경으로 떠나면서 이곳에는 가장 아끼는 아들 한 사람을 남겨 두면서 마을을 잘 지켜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래야만 주변 마을에서도 서로 믿고 의지해서 모두가 편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했는데 이때부터 ‘조동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구로다라는 사람이 쓴 <조서느이 전설>책에는 중동의 한양조씨 촌장이 살던 곳은 자손이 번성해서 영원히 후손이 끊어지지 않을 곳이라 했는데 지금 중암중학교가 세워져 있는 곳이 중동의 중앙이 되므로 한양조씨 조지수 집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중동은 일부 지역만 전형적인 주택지로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은 개발 예정지로 확정되어 있어 주변의 정경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지 못하다.

그러나 <조선의 전설>에 기록되었던 고려 때 한양조씨의 시조 마을이라면서 저자의 표현대로 자손이 번성해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곳의 지형 지세를 갖춘 곳임을 몇몇 풍수학자들은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중동이 본래의 간데말로 되돌려 올 수 있는 지역이 될 것은 일산 지역의 신도시 개발과 강서, 가양지구의 아파트 조성으로 그 사이에 끼인 간데말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 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