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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117(90)개의 본관과 237,145가구, 762,767명[10위]. (2000년 통계청 자료)
총 90개의 본관과 672,755명[10위]. (1985년)

임씨는 크게 나주 임씨와 형택 임씨로 나눌 수 있다.
나주임씨의 시조는 고려 때의 임비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회진 임씨는 나주 임씨가 예전에 회진 임씨로 하였으나 지명이 나진으로 바뀌어서 본관을 나주로 하였으므로 나주 임씨로 볼 수 있다.
평택임씨의 도시조는 중국 당나라에서 온 임팔급으로 나주, 회진 임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임씨는 평택 임씨에서 분관 되었다고 한다.
 
 
시조 임비[林庇]
나주임씨의 여러문헌을 안찰해 보면 시조 비조(鼻祖) 조조(肇祖) 원조(遠祖)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조나 비조, 조조는 다 같은 말이다. 그러나 원조(遠祖)라는 말은 그 뜻이 다르다.
나주임씨는 대장군판사재시사공(大將軍判司宰侍事公) 휘(諱) 비(庇)를 시조로 하고 있으나 공의 위로 또한 여러 대가 있고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다고도 하나 세대가 묘원하고 확실한 고증이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해오는 말이 이와 같을진대 휘(諱) 비(庇)를 시조라 함은 도리가 아니다 하여 노촌공(老村公)의 칠의문(七疑文)을 감안 원조(遠祖)라 하고 이로부터 일세(一世)를 기(起)하여 대본(大本)의 의(義)를 나타내고자 함이다.

나주임씨(羅州林氏)의 시조 임비(林庇)는 고려조에서 벼슬을 지내고, 충렬왕이 원나라를 다녀올때 호종했던 공으로 보좌 2등공신에 책록되어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뒤에 상장군에 올랐다. 그 후 시조의 9세손 탁(卓)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을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채 송도 부조현에서 북쪽을 향해 통곡을 한후 금성 회진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임씨의 시원을 이루게 되었다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발라군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금산군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때 나주로 개칭하였다. 조선 인조때 금성현이 되었고, 그후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합쳐서 금성시로 승격하였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
탁의 7세손 붕(鵬)이 예문관 검열과 승문원 주서를 거쳐 예조 및 병조좌랑과 이조를 제외한 5조의 참의를 역임한후 광주목사, 경주부윤을 지냈다.
붕의 아들 복(復)은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삭주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아우 진(晉)은 무신으로 제주 목사와 5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청정비 세워졌다.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와 장악원정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문필로 여생을 보냈다. 호쾌하고 의협한 시풍으로 호남파 시인 가운데 백미로 손곱혔으며, [화사(花史)]와 [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 백호집(白湖集)], [계백류상영록(溪碧 觴永錄)]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이 높았다.
그 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와 부사를 지낸 후 시명(試名)을 떨졌던 [타]와 이괄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던 [게], 안산 군수와 장성 부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가 세워졌던 세량(世良). [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 [동사회강(東史會綱)]과 [노촌집(老村集)] 저자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다.

대장군 임비(林庇)공이 고려의 충열왕이 아직 세자로 있을 때 원(元)나라와 화의(和議)를 위해 갈 때 호종하고 갔다가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임연(林衍)등이 원종(元宗)을 폐하고 그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창(창)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를 알게 된 세자 일행은 원으로 돌아가 원 황제 세조(世祖)의 힘으로 원종이 복위되고, 귀국하여 세자는 1274년 고려 제25대 충렬왕이 되었다.
원과 화의할 무렵 혼란기와 무인(武人)의 오랜 세도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회복하는데 끝 까지 충열왕을 시종보좌(侍從輔佐)한 대장군 임비(林庇)공은 그 공로로 1281년 2등공신이 추록되어 토지와 하인, 철권을 하사받았다.

벼슬은 대장군 충청도지휘사판사재시사(忠淸道指揮指使判司宰寺事)에 오르는 영광을 얻게 되였다.
그 후 시조의 9세손 탁(卓 : 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海南監務)을 역힘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탁의 7세손 붕(鵬 : 중참판 평의 맏아들)이 중종(中宗)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승문원 주서(承文院主書)를 거쳐 예조 및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이조(吏曹)를 제외한 5조(五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광주 목사(光州牧師)로 나갔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특히 그는 문과에 오르기 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논하다가 화(禍)를 입을 뻔 했고, 또 과거를 볼 때 시관(試官)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간사한 무리로 지칭하자 붓을 그 시관의 얼굴에 던지고 과장(科場)을 뛰쳐나왔다. 붕의 아들 복(復)은 명종(明宗) 즉위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무고(誣告)를 입고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그의 아우 진(晋)은 무신(武臣)으로 제주 목사(濟州牧師)와 5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복(復)의 아들로 선조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던 서( )는 인조반정 후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가 되어 적폐(積弊 : 오랫 동안 뿌리 박힌 폐단의 시정과 농사의 장려, 군사의 조련(調練)을 많이 남겨 이념이 있는 정치가로 칭송을 받았으며, 절도사 진(晋)의 맏아들 제(悌)는 당대의 명류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던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知製敎)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문필(文筆)로 여생을 보냈다. 호쾌(豪快)하고 의협(義俠)한 시풍(詩風)으로 호남파(湖南派) 시인 가운데 백미(白眉)로 손꼽혔으며, <화사(花史)>와<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백호집(白湖集)>, <계벽류상영록(溪碧樓觴詠錄)>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詩名)이 높았다.

제의 아우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했던 환( )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는 사재(私財)를 털어 이순신(李舜臣)의 병량을 조달했고, <진사군(進士軍)>이란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대소 전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인조(仁祖) 때의 명 외교관 담(土覃 : 서의 아들)은 기재(奇才)가 있는 정치가로도 이름났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종사관(摠戎從事官)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남격대(南格臺) 수비에 공을 세웠다.

특히 담은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나, 청탁을 배제하고 청빈하여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 어느날 그의 형 연( : 우승지)이 담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도 몸 둘 곳이 없구나"하면서 성(城)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주었다. 그러나 집이 좁고 누추하여 손님이 오면 먼저 온 사람이 물러가야만 뒤에 온 사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牧師)와 부사(府使)를 지낸 후 시명(詩名)을 떨쳤던 타와 이 괄(李 适)의 난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게(게), 안산 군수(安山郡守)와 장성 부사(長城府使)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던 세량(世良). 박세채(朴世采)의 고제로<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 <동사회강(東史會綱)>과<노촌집(老村集)>의 저자(著者)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으며, 한수(翰洙)는 철종(哲宗) 때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구한말에 와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영준(英儁)의 아들 창택(昌澤)이 백운동(白雲洞)에 은퇴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며<숭악집(崧岳集)>을 저술했고, 용상(龍相)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광복운동(光復運動)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을 지낸 병직(炳稷)과 함께 나주 임씨의 전통(傳統)을 빛냈다.
 
감무공(監務公) 탁(卓)의 묘소
전남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 임을산
나주(羅州)는 전라남도(全羅南道)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발라군(發羅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이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고, 고려 태조때 나주(羅州)로 개칭하였다. 995년(성종 14) 해양도(海洋島)에 속했다가 1018년(현종 9) 목(牧)으로 승격하였고, 조선 세조(世祖) 때 진(鎭)을 두었으며 인조(仁祖) 때 강등하여 금성현(錦城縣)이 되었다.
후에 주(州)로 승격하고 1733년(영조 9) 다시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1737년(영조 13) 복구, 1894년(고종 31) 나주부가 되어 관찰사가 주재했으나 1895년 나주부가 폐지되어 전라남도의 한 군으로 강등되었고, 1931년 나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81년 나주읍(羅州邑)과 영산포읍(榮山浦邑)이 합쳐서 금성시(錦城市)로 승격하였다.

나주임씨(羅州林氏)의 시조 임 비(林 庇)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지내고, 충렬왕(忠烈王)이 원(元)나라를 다녀올 때 호종(扈從)했던 공으로 보좌2등공신(輔佐二等功臣)에 책록되어 철권(鐵券)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뒤에 상장군(上將軍)에 올랐다.
그후 시조의 9세손 탁(卓 : 호군 선의 아들)이 고려 말에 해남 감무(海南監務)을 역임한 후 고려의 국운이 기울고 조선이 개국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안은 채 송도(松都) 부조현(不朝峴)에서 조천관(朝天冠)을 벗고 북쪽을 향해 통곡하면서 금성(錦城) 회진(會津)으로 내려가 불사이군의 충절(忠節)을 지켰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 사람으로 후세에 추앙을 받았고 그로부터 나주 임씨의 시원(始原)을 이루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으로는 탁의 7세손 붕(鵬 : 중참판 평의 맏아들)이 중종(中宗) 때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승문원 주서(承文院主書)를 거쳐 예조 및 병조좌랑(兵曹佐郞)과 이조(吏曹)를 제외한 5조(五曹)의 참의(參議)를 역임한 후 광주 목사(光州牧師)로 나갔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지냈다. 특히 그는 문과에 오르기 전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유생(儒生) 200여 명을 이끌고 조광조(趙光祖)의 억울함을 논하다가 화(禍)를 입을 뻔 했고, 또 과거를 볼 때 시관(試官)이 간사한 집권자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을 간사한 무리로 지칭하자 붓을 그 시관의 얼굴에 던지고 과장(科場)을 뛰쳐나왔다.

붕의 아들 복(復)은 명종(明宗) 즉위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삭주(朔州)에 유배되었다가 풀려 나와 무고(誣告)를 입고 향리에 내려가 은거하였으며, 그의 아우 진(晋)은 무신(武臣)으로 제주 목사(濟州牧師)와 5도 병마절도사(五道兵馬節度使)를 역임하며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에 녹선되고 청정비(淸政碑)가 세워졌다.
복(復)의 아들로 선조때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했던 서(서)는 인조반정 후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 수군절도사가 되어 적폐(積弊 : 오랫 동안 뿌리 박힌 폐단의 시정과 농사의 장려, 군사의 조련(調練)을 많이 남겨 이념이 있는 정치가로 칭송을 받았으며, 절도사 진(晋)의 맏아들 제(悌)는 당대의 명류로 많은 일화를 남겼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했던 백호(白湖) 제(悌)는 지제교(知製敎)와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으나 당시 격렬했던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전국 명산(名山)을 찾아다니며 문필(文筆)로 여생을 보냈다. 호쾌(豪快)하고 의협(義俠)한 시풍(詩風)으로 호남파(湖南派) 시인 가운데 백미(白眉)로 손꼽혔으며, <화사(花史)>와<수성지(愁城志)>를 비롯한<백호집(白湖集)>, <계벽류상영록(溪碧樓觴詠錄)>등의 문집을 저술하여 크게 문명(文名)을 떨쳤고, 그의 아들 탄(坦)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시명(詩名)이 높았다.

제의 아우로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역임했던 환(환)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에는 사재(私財)를 털어 이순신(李舜臣)의 병량을 조달했고, <진사군(進士軍)>이란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 대소 전투에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인조(仁祖) 때의 명 외교관 담(담 : 서의 아들)은 기재(奇才)가 있는 정치가로도 이름났었고,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총융종사관(摠戎從事官)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남격대(南格臺) 수비에 공을 세웠다.
특히 담은 예조(禮曹) 및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으나, 청탁을 배제하고 청빈하여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다.

어느날 그의 형 연(연 : 우승지)이 담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가 벼슬이 높아도 몸 둘 곳이 없구나"하면서 성(城) 서쪽에 조그마한 집을 사서 주었다. 그러나 집이 좁고 누추하여 손님이 오면 먼저 온 사람이 물러가야만 뒤에 온 사람이 들어올 수 있었다 한다.

그 밖의 인물로는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원종공신(靖社原從功臣)에 책록되고 9군의 목사(牧師)와 부사(府使)를 지낸 후 시명(詩名)을 떨쳤던 타와 이 괄(李 适)의 난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던 게(게), 안산 군수(安山郡守)와 장성 부사(長城府使)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던 세량(世良). 박세채(朴世采)의 고제로<창계집(滄溪集)>을 저술했던 영(泳 : 첨지중추부사 일유의 아들), <동사회강(東史會綱)>과<노촌집(老村集)>의 저자(著者) 상덕(象德) 등이 유명했으며, 한수(翰洙)는 철종(哲宗) 때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구한말에 와서는 절충장군(折衝將軍) 영준(英儁)의 아들 창택(昌澤)이 백운동(白雲洞)에 은퇴하여 후진양성에 진력하며<숭악집(崧岳集)>을 저술했고, 용상(龍相)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보현산(普賢山)을 중심으로 광복운동(光復運動)에 헌신하여 독립운동가로 외무부장관(外務部長官)을 지낸 병직(炳稷)과 함께 나주 임씨의 전통(傳統)을 빛냈다.
 
성세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나주임씨(羅州 林氏)는 남한에 총 62, 205가구, 262, 86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집성촌
전북 남원군 산동면 월석리
전남 무안군 삼향면 유교리
전남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
전남 장성군 남면 삼태리
전남 완도군 완도읍 망석리
전남 완도군 청산면 국산리
경북 달성군 화원면 설화동
충남 서천군 화양면 와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