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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56(52)개의 본관과 186,610가구, 603,084명[19위]. (2000년 통계청 자료)
총 54개의 본관과 509,077명 [19위]. (1985년)

류씨는 선계(先系)는 중국(中國) 고대의 제왕(帝王)이 황제(黃帝)의 후예 류색(柳穡 : 본명 류승색)이다.

류씨는 옛 문헌에는 131개 본관으로 나타나 있으나 주요 본관은 차씨에서 성을 바꾼 고려 때의 류차달을 시조로 하는 문화류씨, 고려 때의 류정(柳挺)을 시조로 하는 진주류씨, 신라 때의 류영(柳英)을 시조로 하는 고흥류씨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외에 문화 유씨 10,13세손에서 분관을 한 풍산, 서산, 전주, 진주(인자), 선산류씨가 있다.
 
 
문화류씨의 기원(起源)
우리 나라에서 류씨(柳氏)로서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의 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의 주(註)에 ‘공의 6세조 차달(車達)은 고려 태조의 개국을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관직은 대승(大丞)이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랑의 황해도 문화현(黃海道 文化縣)의 인물편에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가 남방(南方)을 정벌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다.

그 아들 좌윤 효금(左尹孝金)이 일찌기 구월산을 유람하다가 대호(大虎)를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 줌으로써 그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또한 좌윤공의 5세손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 이하 수대의 사행(事行)이 휼륭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류씨는 고려 개국 이후 조선을 거쳐 우금 천여년 동안 많은 명경석학(名卿碩學)이 계속 배출되어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한 명벌(名閥)로써 옛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 왔다.
 
외사씨(外史氏)의 류씨평(柳氏評)
초간 문간해(草澗 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대동운부군옥)에는 동한(동한)명벌 20성(姓) 중에 류씨를 9위에 넣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은 이천부사 류공경소 묘갈명(利川府使 柳公景紹 墓碣名)에는 ‘문화류씨는 규조가 성황하여 다른 씨족이 바래지 못하였다’고 하였으며,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등이 지은 증보문헌비고에는 ‘고려 사인(士人)에 족망상고(族望相高)로 류 최 김 이 4성이 귀종(貴種)이라’ 하여 고려 4대 명족 중에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으며,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려室記鉥)에서 ‘우리 나라 족보(族譜)의 효시(嚆矢)는 가정(嘉靖)년간에 간행된 문화류씨세보’라 하였다.
명나라의 학사 우신행은 ‘동국의 류씨는 진나라의 왕씨(王氏). 사씨(謝氏), 당나라의 최씨. 노씨(盧氏)에 내리지 않는다. ’ 하였으니 국내외를 막론하고 류씨의 성망이 얼마나 울연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류씨의 관향
씨족통고(氏族通考)에 류씨의 관향이 15본이 전하는데
즉 대종(大宗)이
문화(文化), 풍산 서산(瑞山) 선산(善山) 전주(全州) 진주(晋州) 고흥(高興) 영광(靈光) 8본은 현존하며
육창(陸昌) 정주(貞州). 연안(延安). 백천(白川). 부평(富平) 약목(若木). 인동(仁同)등 7본은 미약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문화현(文化縣)의 연혁
고대 단군조선(檀君朝鮮)때 당장경(唐藏京)이었는데 고구려 (高句麗)때에 이르러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다.
고려초기에 유주(儒州)로 고쳤더니 성종때에 시령(始寧)으로 바뀌고
현종 9년戊午(1018)에 풍주(豊州)에 예속시켰다가
예종원년 丙(1106)에 유주(儒州)로 복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다.
고종46년 기미(1959)에 위사공신(衛社功신)류경(柳경)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개칭하는 동시에 현(縣)으로 승격시켜 현령을 두었다.

조선에 이르러서도 그대로 따라 현령과 훈도(訓導)를 각 1인씩 두었다. 광해군 10년 무오1618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곧바로 현(縣)으로 바뀌었다. 고종 32년 을미 1895에 군(郡)이 되었더니 경무(庚戊)1910한일합방이 된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文化面)이 되었다.
단군(檀君)가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이 곳 당장산(唐藏山: 구월산) 으로 옮겨 당장경(唐藏京)이라 일컬었는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이곳에 삼성사 를 지어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3위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이 곳 문화에서 동쪽으로 안악군계(安岳郡界)까지 19리요, 남쪽으로 신천군계 (信川郡界)까지 13리요. 서쪽으로 송화현계(松禾縣界)까지 47리요, 은율현계(殷栗縣界)40리요. 북쪽으로 장연현계(長連縣界)까지42리요, 경도한양까지는477리이다. 이 문화 고을의 풍광을 읊은 제영중에 조선조의 문신이 이초는 ‘인사는 기한이 있어 서로 바뀌는데, 계산(溪山)은 옛과 같이 스스로 맑도다. ’하였고 김처례는 ‘시냇가에 해가 길으니 중천이 따사롭고, 하늘 끝에 구름이 열리니 월악이 기이하다. ’ 하였다.
 
문화유씨 시조 유차달 (柳車達)
(고려 태조조 공신 문화류씨 시조)
초휘 해(海). 자 응통(應通). 호 아사(鵝沙). 공은 신라말기에 유주(儒州), 지금 황해동 신천군 문화면(黃海道信川郡文化面) 묵방동(墨坊洞)에서 태어났는데 가세(家勢)가 심히 부호(富豪)였다.
후삼국(後三國)시대에 궁예(弓裔)의 신하 왕건(王建)이 신망을 얻어 천하를 통일코자 후백제(後百濟)의 견휜을 정벌하려 할 즈음 군량이 부족하여 나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이 때 공가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보급하므르써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高麗)를 건국, 태조(太租)가 되었다.
이에 태조가 공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함과 아울러 대승(大丞)의 관작을 내리고, 차운달량(車運達糧)의 뜻을 취하여 차달(車達)이라 사명하였다.

배위 김씨(金氏)는 신라 태부 알지(太傅 閼智)의 후손 균의 따님으로 2남을 두어 효전(孝全)은 대광백(大匡伯)에 추봉되고, 효금(효금)은 좌윤(左尹)을 지내었다.
공의 묘소는 황해도 구월산 남록 인좌에 모셔져 석의(石儀)가 갖추어 있고, 묘소 아래 재실 경사루(敬思樓)가 현존하고 있다.
원파록(源派錄)에 의하면, 공은 신라 승상 색(丞相고)의 5대손이요. 월흑산장 보림(月黑山長 普林)의 아들이라 하였고, 고려 태조가 구성(舊姓)차 씨(車氏)의 휼륭한 공적을 잊지 못할 것이요. 류씨(柳氏)로 행세한지 이미 오세(五世)이니 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효전으로 차씨를 승습토록하고, 효금으로 류씨를 계승토록하라 하였다. 이로서 효전은 차 씨시조가 되고, 효금은 류씨를 계승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동사(東史)에 의하면, 고려태조가 장차 견휜을 치려하는데 군량이 부족함을 걱정하니 장수들이 남방(南方)은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의 남은 곡식이 많다. 하였다. 이 때 공가 백성들의 곡식을 약탈한다면 어찌 날리를 평정하고 포악무도한 적도를 무찌르는 명분이 설수 있습니까 저의 집에 비축된 곡식이 있으니 그것으로써 군량의 공급을 돕겠읍니다. 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레 일천 대를 만들어 군량을 보급하였다. 구월산에 흥률사(興栗寺)란 절이 있는데, 이는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도의선사 (道義禪師)로 하여금 자리를 잡아 창건케 한 절이다. 그 후 고려 공민왕 5년 丙申(1356)4월 법원선사(법원선사)가 중수하고 조선(조선) 숙종(숙종)10년 갑자(1684)애 또 중수 되었다.

숙종 갑자 중수시에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었는데. 이 글은 공민왕 병신에 법원선사가 쓴 기록으로서 그 가운데 우리 대승공에 관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절에 한 신인(神人)이 있었으니 눈섭이 그린 것 같고 머리는 검으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마음씨는 해처럼 밝으며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의 생각 같아 인의의 은혜가 있고 도덕이 빛났다. 어느날 정자 와서 왕장군의 진중에 군량이 떨어져 전공을 이룰지 알수 없는데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한가히 졸고 계십니까? 하였다. 신인이 잠을 깨어 내심으로 충절을 하 할 것을 다짐하고 하룻 밤 사이에 수레 천 대를 제작하여 군량을 실었는데 운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이 때에 이절의 부처의 신력으로 청의 와 홍의를 입은 신군 일천여명을 동구 밖에 출동시켜잠시에 그들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전공을 크게 세우고, 삼한(三韓)을 통합하게 하니 그 공이 은탕왕(殷 湯王) 때 이윤(伊尹)과, 주 무왕(周 武王) 때 여상과 같은지라, 이로 인하여 신인에게 차달이란 이름을 주었다.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하였다.
 
문화류씨 세덕(世德)
문화류씨는 고려. 조선 양조에 걸쳐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우리 나라의 명문으로 일컬어 왔다.
본 선세편에 그 사행을 자상히 기록한 바 통사에서는 대략 열거하였음을 밝혀둔다.
고려조에는 시조 대승공 차달 이후로 염근(廉謹)과 문필(文筆)로 이세의 사표(師表)가 된 문간공 공권
권신을 제거하여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킨 문정공 경(文正公 璥)
신의를 찬술하여 예절을 바로잡은 정신공 승(貞愼公 陞)
강직한 기개로 정령(政令)을 쇄신한 장경공 돈(章敬公 墩)
충직한 말로서국기를 진작시킨 온정공 인기(溫靖公 仁琦)를 사세오공(四世五公)으로 일컫는다.
조선조에 들어상신으로는 위하도회군으로 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좌의정 만수(曼殊)
태종을 보필하여 국기를 다진 우의정 량(亮)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고 국정에 지대한공을 새운 영의정 정현(廷顯)
국초에 청렴재상으로 백세의 추앙을 받는 우의정 관(寬)
중종반정후 인망으로 정승에 재추대된 영의정 순(洵)
강직한 지절로 을사사하에 수화를 당한 좌의정 관(灌)
충직으로 을사제현(乙巳諸賢)을 설원시킨 중신 영의정 전 (전)
청백재상으로 문필이 구비한 영의정 상운(尙運)

건저소(建儲疏)로서 경종을 보필한 소론 사대신의 일인인 좌의정 봉휘(鳳輝) 등이다

문형(文衡)에 오른이는 송암 관(松庵 灌)
호당에 선발된 이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사육신의 일인인 낭간성원(낭간 誠源)

기묘사화에 조정암을 구하려다가 관직을 버리고 의리에 죽은 항재 운(恒齋 雲) 우복당 전(遇伏堂 전), 이조참판 희발(吏曹參判 希發), 제교 희량(霽嶠 希亮)이며,
경연초선(經筵抄選)에 오른이는 학문과 행의로 백세의 사표가된 백석 집(白石 집)이다.

청백리에 녹선된 이는 우의정 관(右議政 寬), 선산부사 희철, 승지 혼 . 영의정 상운
절신(節臣)으로는 낭간 성원
단종손위에 절의를 지키고 명화 지곡송학도를 남긴 서산 자미
기묘사화에 조정암과 함께 피화되어 항리에서 여생을 마친 빙고별제 맹연 항재운. 송암 관이다.

공신으로는 태종조 좌명공신인 문성부원군 량
세조조 정난공신인 문성군 수, 문성군 하, 문천군 서, 문원군 사
성종조 좌리공신인 문양군 지
중종조 정국공신인 문성부원군 순, 문원군 응룡과
평난공신인 시령부원군 전
호성공신인 문양군 희림
선무공신인 문흥군 사원
형난공신인 문평군 공량, 문천군 인길등이다. 장인이 3인이니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등재된 문과 급제자는, 고려조에 문간공 공권을 비롯하여 복야공 택, 문정공 경, 장경공 돈, 문간공 관, 충경공 량 등 6인이며, 조선조에 들어서는 문숙공 사눌을 비롯하여 134인 도합140인이다. 그 밖에 무과와 생원. 진사에 급제한 이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문화류씨는 옛부터 고향을 지키며 세거하였으나 지금은 세태의 변화로 말미암아 거의 이행한 실정이다.
 
집성촌
다음은 일제 때 국세조사 통계에 의한 자료로, 당시 30호 이상 거주 동족부락을 파별로 열기하였다.

사랑공파
안악군대향면생근리, 영덕군 오보면삼계리, 청주군 남이면 금대리, 남일면 가중리, 북일면, 북이면, 보은군, 탄부면 매화리.

문숙공파
이천군 모가면 송곡리, 제천군 금성면, 청풍면.

하정공파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 염암군 신북면 모산리, 여수군 율촌면 가장리, 정읍군 덕천면 달천리, 충주군 노은면 안락동,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연백군 유곡면 식현리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 양평군 양평면 회현리, 안악군 서하면 덕일리, 신천군 초리면 홍학리, 장단군 강상면 마성리

장령공파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곤산군파
달성군 해안면, 경산군 안심면 신서동,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칠곡군 약목면, 석적면, 밀양군 삼량진면 청학동

문평군파
괴산군 사리면 중흥리, 청주군 사주면 신봉리, 오창면 양청리, 보은군 산외면 산대리

지후사공파
담양군 창평면 유곡리, 임실군 삼계면 강촌리, 순창군 금과면 남계리, 군위군 효령면 오천동, 병호동, 중화군 양정면 대내리, 부여군 충화면 만지리, 복금리, 진천군 행정리, 시흥군 군자면 군자리

좌상공파
포천군 서면 자작리, 양산군 읍내면 산 막리, 울산군 서상면 양정리, 나주군 본양면 덕림리, 동호리, 칠곡군 칠곡면 죽전리, 영천군 북안면, 부여군 현내면 영창리, 양주군 진접면 팔야리, 진양군 수곡면 원당리, 산청군 시천면 천평리, 합천 함안군 가야면 신음리, 사천군 서포면 자혜리, 강화군 송해면 신당리, 김해군 진례면 청천리, 김해면 외동리,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여주군 북내면 주암리, 홍천군 화촌면 외삼포리, 천안군 성거면 석교리, 성진군 학상면 왕덕동, 공주군 우성면, 탄천면, 신풍면, 부여군 초촌면 응평리, 정읍군 소성면 중광리, 진양군 금곡면 송곡리.

검한성공파
가평군 하면 신상리, 화순군 동면 언도리, 온양군 탕정면 동산리, 연천군 백학면 노곡리, 옥천군 옥천면 구일리, 진양군 대평면 당촌리, 김제군 공덕면 황실리, 존걸리, 백산면 상정리, 홍사리, 전주군 초포면 송전리, 장성군 북이면 여률리, 촌천군 신북면 지내리.

정숙공파
평산군 세곡면 수동리, 문암리, 옥천군 군복면 추소리, 무주군 적상면 삼류리.

판사공파
칠곡군 동명면 학정리.

수사공파
평택군 서탄면 봉남리

부윤공파
고양군 중면 백석리, 양평군 개군면 계전리, 당진군 고대면 당진포리, 제주군 대정면 인성리, 안덕면 사계리, 화순리.

충경공파
곡성군 곡성면 신기리, 대평리, 논산군 두마면 향한리, 연산면 백석리, 임리, 가야곡면 삼전리, 해남군 해남면 해리, 시흥군 수암면 와리, 고잔리, 선산군 구미면 사곡리,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거장군 주상면 금현리, 영광군 묘량면 덕흥리, 거창군 주상면 거기리, 청주군 강서면 휴양리, 보은군 내북면 창리, 회북면고석리, 서산군 부석면 가사리,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합천군 야로면 묵촌리,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보은군 회남면 서탄리, 합천군 대양면 덕정리, 고성군 고성읍 대평리,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 오곡면 오지리, 남원군 수지면 초리, 구례군 광의면 대산리, 익산군 함염ㄹ면 흘산리. 와리,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 영암군 덕진면 장등리, 장성군 삼서면 수해리, 광주군 오치면 오치리. 여주군 강천면 도전리, 거창군 고제면 궁항리, 옥천군 군북면 대정리, 대덕군 탄동면 방현리, 천원군 성남면 신덕리, 석곡리, 대흥리, 대정리,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공주군 사곡면, 남해군 설천면 분항리, 서면 정포리 서천군 마산면 벽오리, 예산군 신양면 가지리, 임천군 세도면 화수리, 부안군 하서면 장신리, 달성군 다사면 방천동, 장수군 계남면 화양리, 무주군 무주면 당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