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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15(13)개의 본관과 57,248가구, 184,555명[38위]. (2000년 통계청 자료)
총 13개의 본관과 163,513명[37위]. (1985년)
성(成)씨의 뿌리
성(成)씨는 원래 중국 성씨로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 자손이 나라 이름인 성(?)을 성씨로 삼았으나 초나라에게 나라가 망하자 읍변을 떼어 버리고 성(成)씨라고 하였다.
그 후 당나라 때에 학사 성경이가 우리 나라로 건너왔고, 백제에는 성충, 신라에는 성저라는 사람이 있었으나 우리 나라의 성(成)씨와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성씨의 본관 (관향)은 창녕(昌寧)이다.
관향의 유래를 보면 성(姓)이 없던 시기에는 그 사람 의 출신지를 이름 앞에 넣어 신분의 표시로서 성(姓)의 구실을 했었다.

시조 성인보의 혈통
시조 성인보의 아버지는 성숙생으로 신라 대관 성저의 후예라고 한다. 성인보(成仁輔)는 창녕에서 대대로 살아온 선비이며 창녕에서 호장 중윤(고려 때 향직의 우두머리)을 지냈다. 후손들도 창녕에서 정착하여 살았으므로 본관을 창녕으로 하였다.
삼국 말기에는 호걸이 각 주군에 할거하고 있어 고려 태조는 관원을 파견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 는데, 당시 장민자를 호장이라 하고 장병자는 장교라고 하였다 한다.
그 후손들도 창녕에 정착 세거함으로서 창녕을 본관으로 삼았다.
문헌에 의하면 성인보는 고려 명종 때 사람으로 고종 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한다.

시조의 묘소 일화
창녕읍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대지면 모산리 맥산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어느 해 정월 초, 성인보는 송경에서 지방 관리의 하례(賀禮) 모임이 있어 그 곳에 갔다가 병사하였다. 문하시중으로 있던 그의 아들 송국(松國)은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 업고 울며 천리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청산원(고암면 어은에 위치한 주막)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 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 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어 그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았다. 발자국이 끝나는 곳을 보니, 온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는데도 묘자리 넓이 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그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묘소는 창녕군 대지면 맥산에 있고 향사일은 음력 10월 1일이다.

시조 이후의 혈손
그 후 창녕성씨는 시조의 손자 공필(公弼), 한필(漢弼)대에서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지고, 6세에 내려와서는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 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
송여완
시조의 현손 여완(汝完)이 우왕 때 정당문학으로 창녕부원군에 봉해졌으나, 1392년 충신 정몽주가 살해되자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졌음을 알고, 포천의 왕방산 아래에 은둔하고 스스로 왕방거사로 불렀다.
조선이 개국한 후 이태조는 원로라 하여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며 아들 석린(石璘)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나는 왕씨의 신하이니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하며 절의를 지켰다.

성석린
이성계와 옛 친구로서 조선 창업에 공을 세웠던 석린(石璘)은 태종 때 좌명삼등 공신으로 창녕부원군에 진봉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석린의 아우 석용(石瑢: 대제학 역임), 석연(石?: 대사헌. 우정승. 호조판서 역임), 석번(? : 낭장 역임) 등도 크게 현달하여 이들이 조선 초기에 명문의 기틀을 마련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대제학 석용(성삼문 부친)의 인맥
성석용의 아들 서달생(徐達生)이 지중추원사를 거쳐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그의 아들 승(勝)은 중추원 부사를 거쳐 단종 때 의주 목사에 이르렀다.
그 후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이 창덕궁에서 개최될 때 도총관 유응부와 함께 운검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 베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했으나, 갑자기 운검을 그만두라는 세조의 명으로 거사가 어렵게 되자,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가 김질의 밀고로 복위 음모가 발각되어 아들 삼문(三問),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 손자 등과 더불어 죽음을 당했다.

성삼문(成三問) 조선 사육신.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도총관 성승의 아들.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했으며,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했다.
집현전 학사에서 수찬 집현전을 거쳐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禮記大文諺讀)>을 편찬했다.
1442년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고, 정음청에서 정인지(鄭麟趾),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등과 함께 한글 창제를 앞두고 당시 요동에 유배되어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다시 명나라에 여러 번 건너가서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하여 그 정확을 기한 끝에 1446년 9월 29일 훈민정음을 반포케 했다.

1455년 예방승지로서 세조가 단종을 쫓고 왕위에 오르자 국쇄를 안고 통곡했으며, 다음해 좌부승지로서 아버지 승(勝)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협의하여 4월에 여나라 사신의 송별 연회석상에서 운검을 쥐게 된 아버지와 유응부가 세조를 죽이고 이어서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정인지 등 일파를 없애기로 했으나 당일 운검을 그만두게 되어 후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모의에 가담했던 김질이 밀고함으로써 하위지(河緯地) 유응부 이개 등과 함께 체포되어 친국을 받고, 거열의 극형을 받았다.

이어 아버지 승도 주모자로 극형을 당했고, 세 동생, 네 아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홍주의 녹운서원(綠雲書院), 육신묘가 있는 노량진에 세워진 민절서원(愍節書院), 영월의 창절서원(彰節書院), 의성의 학산충렬사(鶴山忠烈祠), 창녕의 물계서원, 연산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에 5신과 함께 제향되었다.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에 다른 6신들과 함께 그의 묘소가 있다.
7월의 문화인물
성삼문 문화관광부는 조선초기 문신으로 한글창제에 공헌했고 충절과 의리의 삶을 보여준 매죽헌(梅竹軒)성삼문(成三問, 1418~1456)선생을 '7월의 문 화인물'로 25일 선정했다.
성삼문은 조선 태종18년 충청도 홍주 적동리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 면 노은리)외가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기 전 공중에서 '낳았느냐'고 묻는 소 리가 세 번 들렸다 하여 이름을 '삼문(三問)'이라 지었다고 한다. 집현전 학사이자 어문학 및 음운학자로서 세종을 도와 한글을 만들고자 중국 랴오둥 을 13차례나 왕래하는 등 훈민정음 창제에 이바지했다.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불의로 규정하고 단종의 왕위 회복을 도모한 그는 부귀영화를 물리치고 충절과 의리를 끝까지 주장하다 38세의 나이로 처참한 최후를 맞은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하다.
거사가 탄로나서 세조가 친국을 할 때 "내 녹(祿)을 먹고 어찌하여 반역을 꾀했느냐"하니 삼문은 "나으리가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나의 집을 적몰하여 따져 보라"고 하였다. 그가 순절한 뒤 세조가 그의 집을 적몰하여 보니 세조가 왕위에 오른 을해년 이후의 녹봉을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날짜를 기록해 두었다고 한다.
한국어문회는 성삼문의 문화인물 선정을 기념해 새달 26일 대우학술재단 세 미나실에서 학술발표회를 개최한다. 이어 매죽헌 성삼문선생 유적보존회는 오 는 10월23일 ‘성삼문 문집 한글번역 출판기념회’ 와 ‘논문학술 발표회’ 를 가질 계획이다.

성석연의 후손들
태종 때 대사헌과 우정승을 거쳐 형, 호조의 판서를 역임했던 석연의 후손으로는 그의 아들 암과 억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암의 아들 3형제 중 장남 염조(念祖)는 이조정랑, 도승지, 경창부윤을 거쳐 판한성부사와 지중추원사를 지내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아우 봉조(奉祖)는 세조와 동서지간으로 형조와 이조의 판서를 거쳐 우참찬, 우찬성, 영중추원사를 지내고 창성부원군에 봉해진후 우의정에 올랐다.
염조의 아들 임(任)과 간(侃), 현(俔) 3형제는 학문으로 대성하여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성종 때 좌참찬을 거쳐 지중추부사를 역임했던 임(任)은 특히 율시(律詩)에 뛰어났고, 글씨는 촉체(蜀體)에 능하여 해서, 초서, 예서에 일가를 이루어, 그의 글을 얻고자 하는 이가 중국에까지 치달았다.
경사(經史)에 통달하여 당세에 문명을 떨쳤던 간(侃)은 누군가가 색다른 책만 갖고 있으면 구해서 통독하여 동료들이 서음(書淫)을 한다고까지 말했고 "내가 능하지 못한 것은 음악뿐" 이라면서 거무고를 배웠으나 서른살에 요절했다. 부자문형(父子文衡)으로 유명했던 현(俔)은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의 한사람으로 불리는 한문학의 대가이다. 특히 그는 [용재총화]의 저자로도 명망이 높았고, 문학보다 그의 소탈한 그의 성품으로 더욱 추앙을 받았다.

염조의 조카 준(俊)은 연산군때 좌의정으로 영의정 한치영, 우의정 이극균과 함께 연산군의 난정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영의정이 되었을때 하루는 내연(內宴)이 있어 재상들도 들어갔다. 한참 술이 얼큰할 때 연산군이 요염한 기생을 껴안으니 그 자리에서 "노신이 아직 죽지 않았사오니 전하는 결코 이러하지 못합니다" 하니 결국 그는 갑자사화 때 직산으로 유배되었다가 교살 되었다. 그의 아들 경온(景溫)도 공조정랑에 이르렀으나 아버지가 화를 입고 자손들까지 남겨 두지 않겠다는 연산군의 말을 듣고 "나의 생명을 남의 손에 더럽힐 수 없다"고 유언하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성현(成俔)
조선 대제학. 호는 용재. 지중추부사 성염조의 아들.
1466년 발영시에 각각 3등으로 급제했다.
홍문관 정자, 대교, 사록 등을 거쳐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경연관이 되고 예문과 수찬, 승문원 교검을 겸했다.
1475년(성종6) 한명회(韓明澮)를 따라 북경에 다녀와 1476년 문과둥시에 병과로 급제하고 부제학, 대사간을 지냈다.
1485년 첨지중추부사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아녀온 후 대사성, 우승지, 형조참판,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1488년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 조서를 가지고 오는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과 왕창(王敞)의 접대연에서 서로 시를 주고 받아 그들을 탄복케 했으며, 이해 동지 중추부사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대사헌, 경기도 관찰사, 장악원 제조,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류자광(柳子光) 등과 《악학궤범(樂學軌範)》을 편찬하여 음악을 집대성했고, 관상감, 사역원, 전의감, 혜민서 등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거기에 딸린 관원에게 문무관의 대우를 하게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한성부 판윤을 거쳐 공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했다.
그의 저서 《용재총화》는 조선 초기의 정치, 사회, 제도, 무화면을 살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성세창(盛世昌)
조선 좌의정. 자는 번중. 시호는 문장(文莊). 판서 성현의 아들.
연산군 때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1507년(중종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1514년 사가독서를 한 뒤 집의, 사간, 천문예습관을 역임하고, 1519년 직제학에 올랐다.
152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다음해 형조참판으로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대사성, 함경도 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1530년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논척하다가 도리어 유배되었으나, 1537년 김안로가 사약을 받게 되자 풀려나와 한성부 우윤, 우참찬, 공조, 형조, 이조, 예조, 호조의 판서, 대제학, 우찬성 등을 역임하고, 1545년(인종1) 죄찬성을 거쳐 우의정으로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에 좌의정이 되었다.
문장에 뛰어났고, 글씨, 그림, 음률에도 뛰어나 삼절이라 불리었다.

성혼(成渾)
조선 좌참찬.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文簡). 성수침의 아들.
17세 때 초시에 합격했으나 신병으로 복시를 못 치르자 과거를 단념하고, 백인걸(白仁傑)문하에서 경학 연구에 정진했다.
선조 초에 학행으로 현감, 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1580년에는 장령직을 굳이 거절하자 마교(馬轎)를 타고 상경하라는 우례까지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에 오르고, 1594년 죄참찬에 이르러 영의정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찍부터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나 학설에 있어서는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을 지지하고, 시발리승 일도설을 주장하는 이이와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을 벌이는 등, 이이의 학설을 반박하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문하에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좌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되었고, 여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성세
158, 335명. (1985년)
집성촌(集姓村)
충북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
충남 예산군 신양면 귀곡리
경남 창녕군 대지면 모산-석리-창산리
경북 상주군 내서면 능암리
모서면 삼포리, 지산리
전북 진안군 동향면 대량리
본관지 창녕
특산물
양파 창녕고추 창녕단감 창녕오이 창녕사과 창녕마늘 풋고추 토마토 파프리카 느타리버섯 성산배 병버섯

남지지역의 풋고추
낙동강 인근의 물빠짐이 좋은 사질 양토의 비옥한 토질을 근거로 1954년부터 시설하우스에서 풋고추와 오이농사를 시작하게 되어 국내에서는 시설 채소 발상지라 할 수 있다.
특히 남지풋고추는 토질이 비옥하고 물빠짐이 좋아 상품성이 뛰어나 남지농협공판장에는 전국에서 상인들의 발길이 잦다. 재배 형태는 9월 하순에 파종하여 수확은 1월 중, 하순에 시작하며 6월 하순까지 수확하는 촉성재배를 하고 있다.

창녕군의 연중 행사
10월 초순경 화왕산 정상에서 개최하는 산악인의 국내대 야간산상행사로 산신제로, 의병추모제, 통일기원횃불행진 등의 행사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