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이름사랑 NameLove > 한국의 성씨 > 성씨의 인구별 순위
전체 32(29)개의 본관과 120,534가구, 389,152명. (2000년 통계청 자료)
총 29개의 본관과 343,985명[25위]. (1985년)

양(梁)씨, 고(高)씨, 부(夫)씨는 함게 탐라국(耽羅國 : 제주)의 지배씨족으로서, 이들 세성의 시조 탄생에 대하여 삼성혈(三姓穴)에서 솟아 나왔다고 한다.
이들 삼신은 짐승을 사냥해서 살았는데 어느날 동쪽으로부터 상자 하나가 바다로 떠내려 와서 열어보니 그 속에는 세명의 미녀와 곡식의 씨앗, 망아지, 송아지가 들어 있었다.
삼신이 세명의 미녀를 각각 배필로 맞아 목축과 농사를 지어 살았다고 한다.
그 중 양을라가 양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양탕이 관순사의 직함으로 신라(新羅)에 가니 왕이 국빈대우를 하며 성주왕자(星主王子)의 작호(爵號)를 내리고 의관(依冠)과 신라(新羅)의 조복(朝服)을 갖추게 했다.
이 때 량(良)을 양(梁)으로 기록하여 양씨로 고쳐졌다고 한다.
양탕(良宕)의 후손 양순과 양우경이 신라(新羅)말기에 남원과 제주로 각각 분관하였다.
 
 
본관지

본관은 청주(淸州), 중화(中和), 안악(安岳), 남원(南原)의 4본이다.
동조동근(同祖同根)으로 생각되나, 그 분파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定說)이 없다.
《청주양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기(起)는 원나라의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서 고려 충선왕 때 제국공주(齊國公主:元 世祖의 딸, 忠烈王妃)를 배행해와서 상당백(上黨伯:上黨은 淸州의 古號)에 봉해졌는데, 그의 제6자 포(浦)가 중화(中和:平南)에 분적하여 중화양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화양씨 측에서는 이를 부인한다. 《중화양씨 세보》에 의하면, 시조 포는 고려 고종 때 정승으로서 당악군(唐岳君:唐岳은 中和의 古號)에 봉해졌으며, 기는 당악군의 장자인 동무(東茂)의 현손으로 기재되었다.

어쨌든 양씨의 유래는 상당백과 당악군의 연대보다도 훨씬 거슬러올라간다. 고려 태조 때의 장군 지(志)를 비롯하여 광종 때의 문신 연(演), 현종 때의 명장(名將) 규(規)와 그 아들 대춘(帶春), 문종 때의 문신 신린(信麟) 등 많은 양씨가 등장하나, 그들의 계보는 분명하지 않다. 중화양씨는 당악군의 5대손 백지(百枝)가 고려 말에 평양 천호(千戶)로서 평양에 자리잡은 이래 그 후손이 주로 평남(平南)을 중심한 일대에 세거하였다.

백지의 7대손 덕록(德祿)은 선조~인조 때 학자로서 알려졌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는 종질(從姪) 의직(懿直)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평양 수복과 군량조달에 공을 세웠다. 중화양씨의 대표적 인물인 희지(熙止/稀枝)는 당악군의 7대손으로 성종 때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직제학에 이르렀다가, 1498년 무오사화 때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대사간에 취임하였으나 유자광(柳子光) 등의 참소로 다시 삭직되고, 뒤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복직되었다. 청주양씨는 사준(士俊), 사언(士彦), 사기(士奇)의 3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날렸는데, 특히 사언은 서예에도 뛰어나 조선 전기의 4대명필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아우 사기도 원주목사, 부평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고 시재(詩才)도 뛰어났다. 그는 자기가 죽을 날과 시간까지 예언하여 바로 그 시각에 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 밖에 청주양씨의 인물로는 단종(端宗) 때 정난공신으로 세조 때 공조판서와 함길도, 평안도의 도절제사를 지낸 정(汀)이 있다.

남원양씨도 많은 인물을 낳았는데 중종~명종 때 산림은일(山林隱逸)로 당대의 명사들과 이름을 나란히 한 백운거사(白雲居士) 공말과, 그의 종형으로서 중종 때 문과에 올라 부사, 호조정랑을 지낸 공준(公俊)의 일가는 호남 순창(淳昌) 지방에 명망 높은 가문이었다. 특히 공준의 아들 홍(洪), 홍의 아들 사형(士衡), 사형의 아들 시진(時晉), 시우(時遇) 형제 등 일가 4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명성이 높았다.

양사형 楊士衡 [1547~1599]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계평(季平). 호 영하정(暎霞亭), 어은(漁隱).
전라북도 순창군 출생. 노진(盧彿)과 유희춘(柳希春)에게서 배웠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를 거쳐 1588년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였다. 군자감 봉사, 직장을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 귀향하였는데, 고경명(高敬命)이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이대윤(李大胤) 등과 함께 모량유사(募糧有司)가 되어 군량을 모으는 일을 맡았다. 1594년에는 삼남을 순시하는 체찰사(體察使) 윤두수(尹斗壽)를 보좌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병활동의 공로로 병조정랑에 임명되고 춘추관기사관, 경기도사, 남평현감, 예조정랑, 영광군수 등을 지냈다. 전라도관찰사 종사관으로서 공명첩(空名帖) 300여 장을 전란중에 불태워버린 일이 뒤에 발각되기도 하였으나,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으며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저서에는 《어은유집》이 있다.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순창 양서보 집안 (2002. 05. 06)

명문가로 알려진 집안들을 찾아가 보면 대부분 400~5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한 집안이 수백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두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하나는 보수(保守)라는 측면이다. 글자 그대로 보호하고 지켜왔기 때문에 수백년간 그 집안이 유지될 수 있었다. 그 보수의 대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존심과 긍지다.

또 다른 측면은 도덕성이다. 도덕성 없는 집안은 수백년 간 이어올 수 없었다. 힘없는 사람들 착취해 당대에 잘먹고 잘살았던 집안들은 그 뒤로 몇 대 못 가 집안이 모두 절단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명문가의 자존심과 긍지를 떠받치는 것은 바로 도덕성이었던 것이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는 자그만치 620년의 역사를 지닌 남원 양(楊)씨 종택이 남아 있다. 조선 초기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지낸 양사보(楊思輔, 1378~?) 고택이 바로 그 집이다. 14세기 후반인 고려 말 우왕 때부터 남원 양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아 21세기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다. 이 집안에서는 전통 명문가가 지니는 보수성과 도덕성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발견된다.

양씨들이 600년 넘게 보수해온 대상은 홍패(紅牌) 2장이다. 홍패는 대과 시험 합격자에게 임금이 내린 합격증을 일컫는다. 이 집안에는 양사보의 조부이자 대제학을 지낸 양이시(楊以時)와 직제학을 지낸 아버지 양수생(楊首生)의 홍패 2장을 보관해 왔다. 요즘도 고시 합격자는 집안의 자랑이듯, 고려말에도 대과에 합격했다는 증표인 홍패는 그 집안의 자랑거리이자 자존심이었다. 현재 고려 시대의 홍패는 전국적으로 4장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2장이 이 집안에 남아 있다.

양씨 집안의 자존심이 홍패였다고 한다면, 그 자존심을 이어가도록 뒷받침한 도덕적 장치는 이웃에 대한 적선(積善)이었다. 양사보의 9대손 양운거(楊雲擧, 1613~1672)는 당시 '소봉'(素封)의 칭호를 들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 특별한 공이 있는 공신을 책봉할 때는 일정한 토지를 주면서 봉군(封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특별한 공이 없지만 돈이 아주 많은 부자에게도 국가에서 주는 칭호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소봉(素封)이라는 칭호였다고 한다. 재산이 특별하게 많은 부자는 정치적 기여가 없어도 재산 그 자체만을 가지고 국가에서도 대접을 해주었던 것이다. 봉군 소리를 듣는 부자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음은 물론이다.

양운거의 아버지였던 양여균(楊汝筠)도 병자호란을 당하여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서 데리고 있던 노비(家童) 수백명을 조직하고, 군량미 삼백석을 마련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도중에 화의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군량미 삼백석을 조정에 바쳤다. 소봉의 칭호를 듣던 큰 부자였던 양운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시에도 수백석의 쌀을 공동체에 내놓았다. 호남 일대에 큰 흉년이 닥쳤을 때, 여기 저기 흩어져 있던 재산을 모아 굶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는 적선사실이 실록(현종실록, 顯宗實錄)에까지 올라있을 정도다.

굶어죽을 뻔한 상황에서 목숨을 구한 인근 사람들은 양운거의 적선을 칭송했다. 당시 재상이었던 정태화(鄭太和)는 그 미담을 확인하고, 그에게 상당한 벼슬을 주려고 하였으나 본인이 한사코 거부하였다. 조선시대 전라도 지역의 부자들은 높은 벼슬을 꺼리는 경향이 있었다. 권력과 재물 두 토끼를 모두 쫓는 일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판단하였음을 눈치챌 수 있다.

양사보의 16대 후손인 양석승(楊錫升, 1849~1928)과 양석우(楊錫愚, 1852~1913) 형제도 적선하는 가풍을 이어갔다.
형이었던 양석승은 양반집안 후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업가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19세기말 기존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상업자본이 형성되던 사회적 전환기를 맞아 양반들이 꺼리던 장사에 과감하게 뛰어 들어 자본을 축적하였던 것이다. 당시 종이수요가 증가하자 한지공장을 설립하여 돈을 벌었고, 전답의 수세를 받을 때 유통에 불편한 쌀 대신에 가벼운 삼베나 무명베로 받아 유통업을 하였다. 그런가하면 가을에 수확한 밤이 쉽게 벌레에 먹히는 단점을 개선하기 위하여 밤송이에 요소를 끼얹어 장기 보관하는 방법을 시도했다. 그가 살았던 순창군 금과면 고례의 집은 ㅁ자 형의 구조였다고 하는데, 서향의 별채 뒤에 디딜방아를 설치해 놓은 집 한채가 또 있었다. 디딜방아 옆에는 천석군이었던 양석승이 쌓아 놓은 볏가마가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공짜로 이 벼를 찧어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어서, 사람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 편하게 벼를 찧어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공짜로 쌀을 가져가는 사람들도 양심이 있어서 3되 이상은 가져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구례 유씨 집안 운조루의 ‘타인능해’(他人能解) 쌀 뒤주와 비슷한 장치이다.

동생인 양석우도 순창 적성강(赤城江, 섬진강 상류) 일대의 포전(浦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줬다. 포전이란 강가에 있는 전답을 가리킨다. 기름지긴 하지만 침수피해가 잦은 전답이라서 주로 기층 서민들이 경작했다. 그러던 중 1910년 한국병합이 되고 전국의 토지실태를 조사하면서 소유주가 분명하지 않은 땅은 일제가 빼앗아갔다. 적성강 주변의 수백 마지기 포전도 소유주가 분명하지 않아 자칫 일제에게 강탈당할 위기에 처했다. 양석우는 수백 마지기의 적성강 일대 포전을 자기 명의로 대거 매입한 다음, 원래 경작자들에게 돈 한푼 받지 않고 무상으로 기증했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 경작민들이 1912년에 세워준 공덕비가 ‘양석우포전시혜유허비’(楊錫愚浦田施惠遺墟碑)이다. 가로 40㎝, 세로 1m20㎝의 화강암으로 된 이 비는 그 동안 적성강변에 있다가 현재는 양석우의 묘 옆에 옮겨져 있다. ( 趙龍憲,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개똥 참봉’ 양석승 (2002. 05. 06)
http://news. chosun. com/media/photo/news/200205/200205060491_00. jpg

참봉이면서 천석의 재산가였던 양석승의 별명은 ‘개똥 참봉’이었다. 참봉 앞에 ‘개똥’이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은 개똥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동네 골목길을 걷다가 혹은 논두렁을 가다가 개똥을 발견하면 반드시 손으로 주웠다. 그리곤 거름 밭에 넣곤 하였다. ‘개똥 참봉’은 그러한 검소함과 부지런함이 담겨 있는 별명이었다.

이렇게 모은 재산이지만 써야 할 곳에는 반드시 썼다. 그는 일제가 만든 학교에 자식들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상당한 돈을 들여 한학 서당을 세웠다. 순창의 유명한 학자이자 우국지사였던 설진영(薛鎭永)을 초빙, 이 서당을 이끌어 가도록 하였다. 그러나 합방 이후 울분을 참지 못한 설진영이 우물에 투신하여 순절해 버리자, 그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런가하면 기미 독립 선언 33인중 하나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 주도하던 독립자금 모집에 남모르게 참여한 듯하다. 그 보답으로 백범의 편지와 위창이 써준 전서체의 ‘야청서소’(也靑書巢)라는 글씨가 현재까지 전해진다. 야청은 양석승의 손자인 양상은의 호이다. 독립자금에 대한 고마움을 당사자에게 공개적으로 표시할 수는 없고, 간접적으로 손자에게 표시했던 것이다.

양씨는 조선시대 27명의 문과급제자를 냈으며, 1960년도 국세조사에서 인구 3만 4727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60위였고, 1985년도 국세조사에서는 1만 9387가구에 인구 8만 1267명으로 성별순위는 274성 중 55위였다.